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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흔들고 설레게 만든, 한 권의 책!

그 책을 쓰기까지

작가는 어떤 정신을 가지고 책을 썼을까요?

우리에게 어떤 글쓰기 조언을 하고 싶을까요?

 

작가의 책, 작가와 관련된 책, 각종 인터뷰와 강의 등에서 문장들을 모았습니다. 

 

이 문장들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영혼 한 틈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그래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옮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 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 나간다..

 

 

새로운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소설가가 할 일이다.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 건네주는 데 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

 

 

내가 소설을 쓰는 한 가지 큰 목적은 이야기라는 하나의 생물을 독자와 공유하고, 그 공유성을 지렛대 삼아 마음과 마음 사이에 개별적인 터널을 뚫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나이가 몇이든, 어디에 있든,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쓴 그 이야기를 당신이 자기 이야기로 확실하게 끌어앉아주느냐 마느냐, 단지 그것뿐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거의 펜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쓸 때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남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남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라라는 피츠제럴드의 문구만이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히 될 리는 없었다. 마흔 살이 되면 조금은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지, 라며 계속해서 썼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의 모든 장소에서 이야기라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줄곧 지켜왔습니다. 그 빛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그 빛으로만 밝힐 수 있는 고유한 장소를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시점을 그 고유한 장소를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주위에 많이 있을 터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든 이 세계에는 책이라는 형태로 밖에 전할 수 없는 생각과 정보가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활자로 된 이야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움직임과 떨림이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지난 삼십 년간 꾸준히 소설을 써왔습니다

소설을 쓸 때 그 안에 오늘날에 맞는 주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일단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한다고 해서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이 시대에 내 작품이 어떻게 읽히느냐 하는 것은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문제인 셈입니다. 그러니 다음 세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거짓이 크면 클수록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소설가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고 호평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소설가는 뛰어난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실에 가까운 허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진실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괴어내 허구가 있는 곳으로 옮겨놓고, 허구의 형태로 치환하여 진실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안에 진실의 소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뛰어난 거짓말을 하기 위한 주요한 자격입니다.

 

 

대부분의 소설가가 그렇듯, 나는 일종의 심술쟁이인지도 모릅니다. “거기 가지 마” “그거 하지 마라고 하면, 특히 그렇게 경고를 받으면,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어지는 게 소설가의 본성입니다. 소설가란 사람들은 제아무리 역풍이 불어닥쳐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제 손으로 직접 만져본 것만 진심으로 믿는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가장 기초에 자리잡은 것은 리듬이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어주지 않겠지. 나는 리듬의 소중함을 음악에서 배웠다.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 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소설가고 어딘가로 진정으로 가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소설가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멋진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당신은 독자로서 그 책을 읽으면서, 잘하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작가와 함께 그곳에 실제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독자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멋진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최대의 효능입니다.

 

 

작가에게 가장 큰 기쁨은 (어쩌면 유일한 기쁨은) 계속해서 뛰어난 새 작품을 내고, 그것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 없다면 세상 사람이 제아무리 멋있다해도 작가는 결국 고독한 존재일 것입니다.

소설가란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세상사를 유효한 문장으로 만들어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 소설가에게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왜 소설가가 글쓰기 이외의 일을 해야 할까요?... 나는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를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뛰어나면서도 바람직한 이야기의 본디 그대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곳이 설령 어마어마하게 멋지고 호화로운 방이라도 상대가 편히 쉬지 못하면 바람직한 방=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겠죠.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일방적으로 이쪽에서만 대접하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상대가 그 방을 마음에 들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나 역시도 도움을 받습니다. 상대의 편안한 마음을 제 마음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상대는 방이라는 매개를 통해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세상사를 서로 나눠가진다는 뜻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게는 그것이 이야기의 의미이며 소설을 쓰는 의미입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것. 그런 생각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정도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다들, 살면서 어떤 하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혹시 운 좋게 찾았다 해도 실제로 찾아낸 것의 대부분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고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리므로이렇게 정리됩니다.

 

 

우리는 장소나 인종이나 언어의 차이를 넘어 이야기를-물론 그 이야기가 훌륭하게 쓰였을 경우에-같은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내 방은 내가 있는 장소를 벗어나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멋진 일입니다.

 

 

나는 이야기라는 방 안에서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고,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며 소설의 힘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그런 것들도 별문제가 안 됩니다. 당신이 누구든 이 방에서 느긋하게 쉬며 이야기를 즐긴다면, 뭔가를 함께 나눈다면, 나는 무엇보다 기쁠 것입니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 그런 소설이 나에게는 좋은 소설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밖의 기준은 내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듣는 이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때로는 배를 움켜쥐며 웃게도 만들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줘야 한다. 뛰어난 이야기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인 효용을 반드시 수반한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청자의 정신을 일시적이나마 어딘가 다른 장소로 전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과장하자면, 청자로 하여금 이쪽 세계저쪽 세계를 나누는 벽을 뛰어넘게 해줘야만 한다. 저쪽으로 원활하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에 부여된 중대한 역할이다.

 

 

작가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시 이야기가 작가에게 더 깊은 몰입을 요구하며 되돌아온다. 그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작가는 성장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더 깊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세상에 영구적인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의 그런 선순환을 믿고 소설을 계속 써나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水原)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활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가는 동안,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고 단단한 암반에 구멍을 뚫어나가는 일을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효율성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나는 평소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아침나절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 책상에 앉아서 내가 쓰고 있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않는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 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

 

 

책상 앞에 앉아 신경을 레이저 광선처럼 한곳에 집중하고, 무의 지평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적합한 단어를 일일이 선택해서 전체의 흐름을 있어야 할 위치에 계속 유지시키는-그러한 작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장기간 동안 필요로 한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있지는 않지만, 뼈를 깎는 듯한 노동이 몸 안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머리(마인드)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의상을 몸에 감싼 채 온몸으로 사고하고, 그 작업은 작가에 대서 육체 능력을 남김없이 쓸 것-대부분의 경우 혹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을 통해서만, 그리고 손에 닿는 재료를 통해야만 사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출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