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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용하던 물건이 고장이 나 고칠 수가 없어도 쉽게 버릴 수가 없다. 그까짓 것 쓰다가 버리는 게 물건이니 새로 사면 그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용한 내 손때가 묻었을 뿐 아니라 그 시간의 추억까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관하기가 힘든 큰 물건은 어쩔 수 없이 버리지만 핸드폰처럼 자잘한 물건들은 가능하면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현대 주거 공간은 이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드는 구조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유럽의 어느 집 창고나 다락방에서, 선조들이 사용했던 100년도 넘은 가구나 옷 그리고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편지 뭉텅이 등 소소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을 때는 참 신기하면서 부러웠다. 만약 나의 어린 시절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다면 삐뚤삐뚤하게 글씨 연습을 했던 공책이나 종이인형 딱지 등, 나를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것 같다.

 

이런 추억을 그리워하는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문화적 가치를 가진 고가의 골동품도 있지만 사용을 하다 내다 파는 일상의 물건들... 이제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기에 물건에게 새로운 생명을 찾아주기 위해서 새 주인을 기다리며 장터에 펼쳐진다 '비록 저것을 누가 살까?' 할 정도로 낡고 볼품없어도 자리를 깔고 앉아 기다리는 이들에게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함께 한 추억들이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표지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뒤늦게 독일 유학을 떠났던 저자는 밤이 되면 일찍 스산해지는 독일 생활에 벼룩시장이라는 열린 공간이 없었다면 무미건조했을 거라고 말한다. 최신 제품에 밀려 버려지는 우리네와 달리, 독일 사람들은 복고 취향이 강해 오래된 물건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벼룩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이 골동품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의 도구들이었던 것이다.

 

어느 곳이나 장터는 가격을 에누리하면서 인간적인 냄새가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청년 대학생 어린이까지 벼룩시장에 들고 나온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소소한 재미와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그것들을 살 때마다 나는 무슨 용도로 썼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그 속에 깃든 얘기를 재미있게 듣곤 했다. 한편으로 나는 그것들 속에서 독일 문화의 깊이를 알려했고 독일 사회를 이해하려 했으며 나의 예술적 안목도 높이려 했다. 때때로 벼룩시장의 오래된 사물들은 미술관의 작품만큼 감상할 가치가 있었다.(28p)

 

벼룩시장을 더욱 재미있게 하는 것은 물건을 사용한 사람이 직접 팔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사용되었을지 상상을 할 수 있다. 투피스 정장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묶어 파는 것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몽당연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모두 300원 하는 이 몽당연필을 저자는 사 가지고 왔다. ‘할머니는 저 연필이 줄어들도록 생의 무엇을 기록했을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주름이 깊게 파인 할아버지가 파는 양은도시락에는 새벽마다 준비한 빵을 넣어주던 아내의 마음과 손길이 담겨있었다. 매일 아침 들고나갔던 이 도시락은 점심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든든한 도시락이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단한 밥벌이의 무게이기도 했다.

 

고물장수가 강냉이도 바꿔주지 않을 것 같은 헌 단추를 팔며 바느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통해 가족을 향한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고, 진공관 라디오를 돌리며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며 맞추었을 할아버지의 손길도 느꼈다. 연필깎이를 통해 연필을 깎으며 무언가 비우면서도 새롭게 시작하는 다짐도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사물이 전하는 각가지 이야기에 빠져든 저자는 주머니가 얇은 유학생 신분이면서도 돈을 아껴가며 벼룩시장의 물건을 사 모았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사물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들의 언어는 처음부터 들을 수 없지만 오랫동안 마음과 눈을 열고 바라보면 시간에 견뎌 온 그들만의 아름다움과 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예술품은 박물관에만 보관된 것이 아니라 별것 아닌 물건에도 예술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심한 눈길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예술은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나의 물건들에게는, 먼 훗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