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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츠바이크가 전쟁의 광증에 사로잡힌, 2차 대전 직전의 유럽 대륙에서 벗어나 브라질로 망명해서 쓴 책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긴 유작이다.  츠바이크는 왜 마지막 순간까지 이 책을, 몽테뉴를, 놓지 못하고 있었을까?

 

츠바이크는 비록 몸은 벗어났어도 유럽에서 날아오는 시대의 피냄새는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신념을 서로 인정할 수 없어서 대규모 살상이 벌어지는 곳을 떠나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과 자책을 할 때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인문주의자 몽테뉴의 삶에서 그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20대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던 츠바이크는 그때는 아무 감흥도 없었다.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권리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몽테뉴가 말하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전혀 필요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빼앗긴 세상이 되어서야 유사한 경험을 한 몽테뉴의 말이 츠바이크에게 위대함으로 다가왔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에도 유럽은 종교전쟁으로 야만성을 드러냈다. 집 앞 조차 나가기 두려운 세상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던 몽테뉴는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타인의 광증이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할 위험에서 자신의 영혼과 생각과 느낌을 지킬 수 있는지?이 질문에 집중했다.

 

몽테뉴는 세상이 광풍에 휩쓸려 혼란스럽고 어리석은 길을 가게 내버려 둔 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성적으로, 인간적으로, 자유롭게 남길 원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무심하다고 비겁하다고 욕해도 내버려 두었다.. 시대의 사건들은 거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며 몽테뉴는 자유로운 내면에 집중했다.

 

스스로를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를 주기 때문에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할 수 있다. 어쩌면 몽테뉴는 각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며 인간성을 회복하기를, 그래야 미쳐있는 세상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네가 스스로 명료함을 지난다면 시대의 광증은 진짜 곤궁이 아니다. 너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들, 패배로 보이는 것들, 운명의 타격은 네가 그런 것들 앞에서 약해질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일들에 가치와 무게를 두고, 그런 일에 즐거움이나 고통을 분배하는 사람에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 너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가장 힘든 압력도 내적으로 확고하고 자유로운 사람을 쉽게 들어 올리지 못한다.(39)

 

츠바이크는 위로가 필요했다. 죽음을 피해 나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고통스러울 때 세상일에 신경 쓰지 마라. 네 안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을 구원하라는 몽테뉴에게 위안을 받으며 현실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츠바이크는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안타깝다. 책을 읽는 내내 몽테뉴를 읽는 것이 아니라 몽테뉴를 통한 츠바이크의 마음이 읽혔다. 마지막까지 인간에 대한 실망과 괴로움에 고통받는 츠바이크가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세상에 체념하고 물러나기보다 츠바이크가 더 버텼으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세상이 연일 시끄럽다.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고 자신만 옳다고 소리 높일 뿐 귀는 닫고 있다. 오직 위로밖에는 할 수 없었던 츠바이크가 겪은 그런 세상이 되기 전에, 올바르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로나 체념보다는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사람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면서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이 필요할 것이다.

 


 

오래 전 읽고 썼던 리뷰입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이 책이 요즘 자꾸 떠올랐습니다.  광기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느꼈을 혼란스러움 당혹감 안타까움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몽테뉴를 통해서 위로받고 싶었던 츠바이크처럼 저 역시 그들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니묄러가 남긴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본이 무너지고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 뻔히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하는 상대가 내가 아니기에 침묵한다면, 언제가 그 불법이 자신들을 향할 때 아무도 나설 줄 이가 없다는 무서운 진실 앞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요즘입니다. 몽테뉴의 조언처럼 귀 닫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면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정말 위로하는 정신이 될까요? 하지만 츠바이크가 그랬듯이, 아직은 저에게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패거리 짓기와 혼란의 시대에 정직함과 인간성 말고 그 무엇이 우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