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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소설을 쓰기 전 지도를 그리는 작업으로 스케치북에 많은 그림을 그리고, 또 스티븐 킹을 뮤즈로 여겨 그의 책으로 공부한 작가이기 때문일까요?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장면의 상상이 선명하게 잘 떠오릅니다. 아마도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감을 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작품인 <내 심장을 쏴라><7년의 밤>이 영화화되었지요.
 
네 번째 책 <28>을 막 끝낸 직후 작가에게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새 소설을 상상해도 피가 뜨거워지지 않았고 잠 못 이후는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이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도 있지만 때로는 뭔가 커다란 변화를 줘서 깨트려야 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히말라야로 가는 것을 고비를 넘겨 볼 방법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때까지 작가는 한 번도 이 땅을 벗어나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골방 체질로, 지금까지 질주만 한 삶을 살아왔기에 뭔가 새로운 도전에 자신을 맡겨 보아야 했습니다.
 
왜 많은 장소 중에 하필 히말라야였냐면, 작가는 전작 <내 심장을 쏴라>에 나오는 주인공 승민이 눈이 멀어가던 순간까지 그리워하던 땅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의 마음속에는 이곳이 어떤 영혼의 자유로움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평소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곳이었기에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누구나 이런 마음의 장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곳에만 가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누구인가?’하는 근원적인 답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장소 말이지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인도가 될 수도 있고 사막이 될 수도 있고 또 한계에 부딪치는 운동경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외국을 나간 본 적도 없고 심각한 길치였던 작가는 주위의 반대가 있었지만 배낭여행 경험이 많은 소설가 김혜나와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에베레스트의 본명은 초모룽마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뜻이 세상의 어머니쯤 된답니다. 네팔 정부가 정한 공식 이름은 사가르마타로 하늘의 이마라는 의미라지요. 에베레스트는 최고봉의 측량 활동에 공을 세운 인도의 측량 국장 조지 에베레스트 경에서 따온 이름이라네요. 네팔의 입장에서는 에베레스트로 불리는 게 달갑지 않을 테니 이렇게 부르고 싶지 않지만, ‘초모룽마라고 부르면 아무도 알지 못하니 어쩔 수 없네요.
 
청년 시절 셰르파로 활동했던 노련한 가이드 검부, 그리고 ‘버럼’과 함께 17일 동안 트레킹을 시작하게 됩니다. 해발 5,416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라고 하는 ‘쏘롱라패스’를 힘겹게 오르기도 하고 위험한 고산병 증상으로 중단해야 할지 고민도 하고 추위로 동상까지 걸릴 뻔도 하지만 그래도 뚜벅뚜벅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과도한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두 작가가 동시에 심각한 변비에 걸립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배가 뭉칠 뿐 별 방법을 써 봐도 도저히 성공할 수가 없었지요. 초반에는 내내 이것과 관련된 고통을 호소하기에 사실 작가가 걸어가는 주위 풍경보다는 언제쯤 작가가 배를 시원하게 비워낼 수 있는지에 더 몰입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너무 허망하게 끝나버리기도 하지만요.
 
작가는 산을 오르기 전부터 이 책을 써야겠다는 구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관대로 메모만 해왔을 뿐이지요. 하지만 작가가 누굽니까? 자료만으로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그런 작가인데 자신이 직접 뛰어 들어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일들이니 더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기도 그렇지만, 작가와 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듯한 생생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에베레스트를 다녀왔다고 하면 뭔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작가는 이곳에서 무엇을 깨닫고 왔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읽었으니까요.
 
그런데 결론은 그런 거창한 깨달음은 없는 듯합니다. 제 느낌뿐 아니라, 작가 역시도 막상 걸으니 생각과 달랐다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트레킹 하는 동안의 주변의 풍경과 일정은 생생하게 보여줘도 발자국 따라 움직였을, 자신의 내면의 흔들림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먼저 떠난 엄마와의 이야기와 자신에게 남겨진 아버지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 등을 고백처럼 들려주기는 합니다만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네팔병’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한 번 히말라야에 다녀오면 반드시 또 가고야 만다는 불치병이란다. 여정의 험난함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로움. 온전히 자신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p304, 작가의 말)

 

 어쩌면 꼭 뭔가 깨달음이 얻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도 강박관념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결국 에베레스트 그곳에는 새벽 3시에 꼭 가야 한다고 통곡을 할 정도로 간절한 그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한계와 부딪치며 견디는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떠나는 게 아닐까요?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나는 여전히 똑같지만, 한계에 부딪치고 이겨낸 자만이 가지는 자신에 대한 믿음은 단단해져 있겠지요. 그것을 얻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꾼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작가는 정말 체력이 좋나 봅니다. 고산병과 변비에 대한 고통은 있지만 그 먼 길을 걸으면서도 다리의 통증에 대한 호소는 거의 없습니다. 그 튼튼한 다리로 뛰어다니며 작품을 쓰고 있을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어쩌면 그 책 귀퉁이 어딘가에는 에베레스트의 바람 소리가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